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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

이수만, 故김민기 빈소에 거액 조의금...유족, 고인 뜻따라 돌려줘

by kindtree 2024. 7. 25.

이수만 전 SM엔터테인먼트 총괄 프로듀서가 서울대 선배이자 가수 겸 '학전' 대표였던 고(故) 김민기의 빈소를 찾아 큰 금액의 조의금을 전달했지만, 유가족 측에서 고인의 뜻에 따라 그 조의금을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가요계에 따르면 이수만은 지난 23일 고 김민기의 빈소를 찾아 조문객들의 식사비로 사용해달라며 큰 금액의 조의금을 전달했다고 합니다. 원래 유가족이 조의금과 조화를 받지 않겠다고 밝혔기 때문에, 이수만은 식사비로 쓸 돈을 전달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유가족은 고인의 뜻에 따라 이수만이 전달한 조의금을 모두 돌려줬다고 합니다. 유족들은 이수만의 마음은 감사히 받았지만, 생전 돈을 우선하지 않았던 고인의 뜻을 따르기로 한 것입니다.

 

고 김민기의 조카인 김성민 학전 총무팀장은 지난 22일 대학로 학림다방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조의금을 받지 않겠다고 밝히며 "학전이 폐관하면서 많은 분들이 선생님을 응원하며 도와주셨다. 충분히 가시는 노잣돈을 마련하지 않으셨을까 한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수만 또한 학전 폐관 당시 마무리 작업을 위해 1억 원이 넘는 금액을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고 김민기의 발인식은 이날 오전 8시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서 엄수되었습니다. 발인식이 끝난 후 장지인 천안공원묘원으로 향하기 전, 고인은 서울 대학로에 위치한 아르코꿈밭극장 마당을 들렀습니다. 아르코꿈밭극장은 고인이 33년간 일궈온 '학전'이 폐관된 후 새롭게 연 극장입니다. 이곳에는 현재 아르코꿈밭극장을 운영하고 있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정병국 위원장을 비롯해 고인과 인연이 있는 여러 배우와 가수들, 그리고 유홍준 교수 등이 모여 김민기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습니다.

 

 

고 김민기는 지난 21일 위암 증세가 악화되어 항암치료를 받던 중 별세했습니다. 향년 73세였습니다. 1951년생인 고인은 서울대 미대 재학 시절 동창과 함께 포크 밴드를 결성해 음악 활동을 시작한 후, 1971년 정규 1집 '김민기'를 발매하며 정식으로 데뷔했습니다. 대표곡 '아침이슬'의 편곡 버전이 수록된 이 음반은 고인의 유일한 정규 앨범입니다.

 

고인은 특히 '아침이슬', '꽃 피우는 아이', '봉우리', '내나라 내겨레' 등의 곡을 발표하며 군사정권에 저항하는 목소리를 노래했습니다. 그는 1970년대와 1980년대 청년 문화를 이끈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1990년대에는 극단 학전을 창단해 학전블루와 학전그린 소극장을 운영했으며, 이곳들은 '김광석 콘서트', '노영심의 작은 음악회' 등 라이브 콘서트 문화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또한 연극, 대중음악, 클래식, 국악, 무용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며 소극장 문화를 일궜습니다.

 

이수만과 고 김민기의 인연은 특별합니다. 두 사람은 서울대 선후배 사이로, 이수만은 학전이 폐관될 당시 마무리 작업을 위해 1억 원 이상의 금액을 지원하며 고 김민기를 도운 바 있습니다. 이번에 이수만이 큰 금액의 조의금을 전달하려 한 것도 이러한 인연과 존경의 마음을 담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고 김민기의 유가족은 생전에 돈을 중요시하지 않았던 고인의 뜻을 존중해 조의금을 받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수만이 전달한 조의금을 돌려받은 일은 가요계에서도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수만의 따뜻한 마음과 고인의 뜻을 존중한 유가족의 결정을 칭찬했습니다. 조의금은 비록 받지 않았지만, 고인의 빈소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의 업적과 인생을 기리며 마지막 인사를 전했습니다.

 

고 김민기의 발인식에는 많은 연예인들과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참석했습니다. 그 중에는 배우 설경구, 황정민, 장현성, 박학기, 가수 이적, 이황의, 최덕문, 방은진, 배성우, 박승화 등 다양한 인물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고인과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며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 했습니다. 또한 유홍준 교수도 고인의 마지막을 함께 했습니다.

 

고 김민기는 33년간 학전을 운영하며 많은 후배들과 동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음악, 연극, 무용 등 다양한 장르를 통해 소극장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그의 업적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의 대표곡 '아침이슬'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으며, 군사정권 시절 저항의 상징으로 남아 있습니다.

 

 

고인은 또한 학전의 운영을 통해 많은 젊은 예술가들에게 무대를 제공하며 그들의 성장을 도왔습니다. '김광석 콘서트'와 '노영심의 작은 음악회' 등은 당시 큰 인기를 끌며 라이브 콘서트 문화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활동들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으며, 고인의 업적을 기리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고 김민기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과 슬픔을 안겨주었습니다. 그의 빈소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의 업적과 인생을 기리며 마지막 인사를 전했습니다. 이수만의 조의금 전달과 유가족의 결정을 통해 고인의 뜻을 존중하는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고 김민기는 비록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음악과 업적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는 1970년대와 1980년대 청년 문화를 이끌며 군사정권에 저항하는 목소리를 낸 인물로 평가받고 있으며, 그의 대표곡 '아침이슬'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극단 학전을 창단해 많은 젊은 예술가들에게 무대를 제공하며 그들의 성장을 도왔습니다.

 

 

고인의 빈소를 찾은 이수만의 마음과 유가족의 결정을 통해 우리는 고인의 뜻을 존중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고 김민기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과 슬픔을 안겨주었지만, 그의 업적과 인생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의 음악과 활동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으며, 그의 뜻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